No project description
01 |
![]() |
국제 분쟁-슬로바키아 vs 헝가리 10701 고예림 1918년까지 슬로바키아는 헝가리제국의 한 부분이었는데 당시에도 슬로바키아는 헝가리로부터의 독립을 추구하였다. 제 1차 세계대전 후 슬로바키아는 체코와 통합하여 체코슬로바키아를 만들었고 헝가리는 별도의 국가로 성립되었다 이 때 국경선 획정으로 발생한 문제가 현재까지 갈등의 배경이 되고 있다. 또한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이른바 베네쉬 대통령령 이라는 것이 제정되면서 체코슬로바키아에 살던 헝가리인들이 추방되었는데 이로 인해 헝가리와 슬로바키아 간의 갈등은 심화되었다. 이들의 갈등은 2004년 유럽연합 가입 이후에도 지속되었고, EU는 회원국인 슬로바키아와 헝가리의 갈등을 양자가 스스로 해결해야 할 문제로 판단하고 개입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
02 |
![]() |
국제 분쟁-서사하라 분리 독립 10701 고예림 서사하라는 역사적으로 모로코 왕국의 지배를 받아왔다. 이 지역은 국토의 98%이상이 사막이기 때문에 모로코 왕권이 크게 미치지 않았으며,주민의 대부분이 국가에 예속되어 있지 않은 유목민이어서 수 백년동안 큰 충돌은 없었다. 하지만 19세기 유럽 열강들의 침략으로 남북으로 갈라서고 말았다. 이후 북부가 먼저 1956년에 독립운동을 하여 독립하고,그로부터 18년 후인 1973년부터 서사하라에서도 독립운동이 일어났다.폴리사리오 전선이라 불리는 마르크스주의 단체가 이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하지만 스페인 정부는 이들을 무시하고 주변국을 불러들여 마드리드 협정을 체결했다.이 협정에 따라 서사하라의 북부는 모로코, 남부는 모리타니에 각각 넘겨졌다. 이에 분노한 폴리사리오는 즉각 영토반환을 주장하며 양측에 전쟁을 선포했다.지속된 게릴라전의 결과 1979년 군사력이 약했던 모리타니가 손 발을 털고 나왔으나,비교적 군사력이 강한 모로코는 지배욕을 버리지 않고 공세를 강화했다. 전쟁의 규모가 갈수록 커져가자 1988년 UN에서 휴전을 중재하였고 1991년에는 UN의 감시하에 독립을 묻는 주민투표를 실시하기로 했다. 하지만 유목민족과 모로코 이주민에 대한 투표권 논쟁이 일어나면서 결국 투표가 무산되었다. 현재 모로코는 서하라의 90%를 강제 점거하고 있는 상태이며폴리사리오는 나머지 10%를 지켜며 끈질기게 독립을 요구하고 있다.또 이들은 독립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대외적으로도 꾸준히 활동하여현재는 전 세계의 약 3분의 1인 70여개국으로부터 독립을 인정받고 있다. |
03 |
![]() |
국제 분쟁- 카슈미르 분쟁 10701 고예림 카슈미르 분쟁을 카슈미르 지방을 두고 인도, 중국, 파키스탄이 서로 소유권을 주장하는데에서 비롯된 분쟁이다. 잠무 카슈미르 지역은 인도 내에서 유일하게 무슬림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알려져 있으며, 인도 헌법 370조에 따라 인도 정부는 카슈미르 지역의 깃발과 입법권을 특별히 인정해주었다. 파키스탄은 카슈미르 지방은 인도와 파키스탄 중 선택해야 한다고 말하였고, 카슈미르의 정치적인 리더인 셰이크 압둘라는 종교때문에 나라가 갈라서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며 파키스탄을 거부했다. 1989년에는 인도의 통치에 반발하는 이슬람 무장통치세력들이 강해졌다. 2019년에는 인도 총리가 헌법 370조의 폐지에 따라 보안군 38000명을 카슈미르 지방에 추가 배치하였다. 또한 학교에 휴교령을 내리고 여행객을 귀국조치 시켰다. 이런 조치는 잠무 카슈미르 지역의 민주주의적 변화가 두려워 내린 조치로 보여진다. |
04 |
![]() |
국제분쟁 -포클랜드분쟁 10701 고예림 포클랜드 제도는, 아르헨티나의 티에라델푸에고 섬에서는 400여km 떨어져 있는 섬이다. 소유권은 현재 영국으로, 인접 국가인 아르헨티나가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아르헨티나는 과거 에스파냐의 식민지로 오랜 식민 지배 끝에 1816년 독립을 선포하였다. 당시 포클랜드 제도는 영국과 에스파냐가 각각 1774년, 1811년 철수한 상황이었다. 이에 아르헨티나 정부는 1820년 포클랜드 제도가 아르헨티나의 영토임을 선포하였다. 하지만 이후 당시 세계 최강이던 영국이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아르헨티나의 영유권 주장은 힘을 잃어갔다. 마침내 1833년 영국은 무력으로 포클랜드 제도를 점령하였다. 이후 포클랜드 제도는 영국령이 되었다. 포클랜드 제도가 영국의 수중으로 들어간 지 150여 년이 흐른 뒤 군부 정권 하의 아르헨티나는 1982년 영국에 선전포고 없이 포클랜드 제도를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그러나 영국군이 72일 만에 탈환에 성공하면서 아르헨티나는 포클랜드 제도 영유권 주장에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최근 천연 자원이 매장되어 있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다시 논쟁이 격화되고 있는 추세이다. |
05 |
![]() |
국제 분쟁-쿠르드족 분쟁 10701 고예림 오늘날 쿠르드인들의 비극적 운명은 1차 세계대전 직후 찾아왔다. 수백년간 오스만 제국의 일원이었던 그들은 1919년 위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크게 고무되어 자치와 독립의 꿈을 품었다. 특히 1920년 8월 10일, 연합국과 터키 정부가 체결한 세브르 조약 제64조는 ‘쿠르드족이 원한다면 조약 발효 1년 이내에 완전한 자치권을 부여’하도록 명시했다. 그러나 1923년 체결된 로잔 조약에서는 인위적 영토구획에 의해 쿠르디스탄이 5개국으로 분할되면서 터키, 이란, 이라크, 시리아, 아르메니아의 영토로 강제 귀속되었다. 하루아침에 나라가 쪼개져 버린 것이다. 유전을 보유한 강력한 쿠르디스탄이란 국가를 원치 않았던 서구와 자국 영토의 4분의 1이 잘려나가야 하는 터키의 강력한 반대로 쿠르드 독립안이 무산된 것이다. 중동에서도 가장 큰 인구집단을 가졌던 쿠르드인들은 5개국에서 각각 소수민족으로 전락했고, 민족 정체성이 소멸될 지경에 이르렀다. 현재 쿠르드 인구 3,200만명 중에 터키에 1,500만명, 이라크에 500만명, 이란에 800만명, 시리아에 200만명 정도로 분산되어 있고 인근 아랍과 유럽 등지에 약 200만명 정도로 추산된다. 가장 많은 쿠르드인이 사는 터키는 동화와 민족 통합 정책을 채택했다. 1923년 설립된 터키 공화국은 기본적으로 쿠르드어의 사용과 교육 자체를 엄격히 금지했을 뿐만 아니라, 터키헌법 89항에서는 터키 영토 내에서 어떤 소수민족도 존재할 수 없다는 내용을 명시하고 있다. 이에 따라 쿠르드인들은 ‘산악 터키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터키정부의 강제 동화정책은 결국 1978년 쿠르드 노동당(PPK)이라는 무장 테러조직의 등장을 자극했다. PKK는 1984년부터 터키 군경에 대한 무차별적인 공격을 개시하여 지금까지 무려 5만명 이상을 죽음으로 몰아넣으면서 강력한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2000년대에 들어 터키의 유럽연합(EU) 가입 협상이 시작되면서 비로소 터키 정부는 쿠르드인들에게 자국말을 쓸 수 있는 자유를 주었고, 쿠르드어 신문과 잡지발행을 허용했다. 올 6월 7일의 총선에서는 처음으로 쿠르드 정당 HDP(인민민주당)가 11.5%를 득표하여 58명의 국회의원이 의회에 진출하는 정치적 진전을 이루기도 했다.한편 이란의 쿠르드족은 터키인이나 아랍인보다는 언어 및 문화적인 유사성 때문에 종족적 갈등이 비교적 덜한 편이며 분리?독립보다는 자치권을 유지하면서 이란에 통합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시리아 쿠르드족들은 내전 상황과 쿠르드 지역을 위협하는 IS에 대한 공포, 터키의 집요한 견제라는 삼중고 속에서도 IS에 가장 강력하게 맞서고 있다.그나마 쿠르드족들의 자치가 가장 잘 이루어지고 있는 나라가 이라크이다. 1974년 헌법 개정을 통해 “쿠르드인이 주민의 다수를 이루고 있는 지역은 헌법에 의하여 자치를 허용한다”는 내용이 첨가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 과정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1976년에는 20만명의 쿠르드족이 쿠르디스탄에서 쫓겨나 이라크 남부의 사막 지역으로 강제 분산되는 고통을 겪었으며, 1980년대에 들어서는 반정부 투쟁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해 수백개 쿠르드 마을에 군인을 투입해 18만명을 체포하고 수천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1987, 88년에는 사담 후세인의 명령에 의해 치명적인 화학무기를 24개 쿠르드 마을에 투하하는 반인륜적 공격으로 세계의 비난을 받았다. 특히 신경가스 공격을 받은 할랍자 마을에서만 5,000명이 사망하는 끔찍한 재앙이 일어났다. 현재 이라크 쿠르드인들은 대학을 설립해 민족교육을 실시하고 자국말과 방송을 자유롭게 사용하고 있다. 또 페쉬메르게라는 독자적인 군대조직을 조직해 쿠르드 독립에 가장 근접해 있다. 2004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때는 미국과 함께 사담 후세인 정권 타도에 큰 공을 세움으로서 현재 이라크 정부에서도 대통령직을 보장 받을 정도로 지위가 향상되었다. |
06 |
![]() |
국제 분쟁-이스라엘 vs 팔레스타인 10701 고예림 거의 20000년 전 유대인들이 로마에 의해 팔레스타인에서 쫓겨나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아오는 동안, 아랍인들이 그 땅에 자리를 잡아 살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 중 영국은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의 군사 협력을 얻기 위해 맥마흔 선언을 통해 그들의 독립을 약속한다. 그러나 전쟁을 위해 시오니스트의 지지도 필요했던 영국은 1917년 밸푸어 선언을 통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 건설을 지지한다는 또 다른 약속을 한다. 지킬 수 없는 두 가지 약속을 한 셈이다. 이후 유럽과 러시아에서 팔레스타인으로 유대인들이 이주해 오기 시작했고, 결국 유엔은 1947년 11월 팔레스타인의 약 56%를 유대 국가에, 약 43%를 아랍 국가에 할당하라고 결정했다. 아랍인들은 이 분할안을 거부했으나 이를 받아들인 유대인들은 1948년 이스라엘을 건국했다. 결국 유엔의 결정에 분노한 주변의 아랍 국가들이 이스라엘을 공격해 1948년에 1차 중동전쟁이 발생했다. 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이스라엘은 유엔이 할당한 영토보다 훨씬 많은 팔레스타인의 78%를 장악하게 된다. 나머지 22%는 가자(Gaza)와 서안(West Bank)으로 나뉘어 1967년 6월 4일까지 각각 '가자'는 이집트의 통치하에, '서안과 동 예루살렘'은 요르단의 통치하에 놓이게 된다. 1956년 이집트가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자 2차 중동전쟁이 발발하는데, 영국과 프랑스가 이집트에 파병하고 이집트의 숙적이었던 이스라엘도 파병을 한다. 전쟁 결과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시나이 반도를 점령한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1967년 이집트의 주도하에 아랍 국가들이 단결해 이스라엘에 전쟁을 도발, 3차 중동전쟁으로 불리는 '6일 전쟁'이 일어난다. 이스라엘은 이번에도 승리하여 이제는 가자와 서안 모두를 점령하게 된다. 1969년 이후 유명한 정치인 야세르 아라파트는 PLO(팔레스타인해방기구)를 결성해 투쟁을 시작한다. 그러나 큰 진전이 없자 '팔레스타인 전체에서 이스라엘을 내쫓고 독립국가를 세우자'는 이상은 완전히 포기한다. 대신 '1967년 이전 경계', 즉 가자와 서안에서만이라도 팔레스타인 독립국가를 수립하게 해 달라고 1976년 유엔 총회에서 요구하지만 미국과 이스라엘은 이마저도 거부한다. 1973년에는 욤 키푸르 전쟁이라 불리는 4차 중동전쟁이 일어난다. 욤 키푸르(속죄날)를 맞아 이스라엘 군이 금식 등으로 병력을 동원하기 어려우리라 예상한 아랍 연합군은 이스라엘을 공격한다. 초반에는 아랍 연합군의 우세한 상황이었으나 미국이 위기에 몰린 이스라엘을 전폭적으로 지원해 겨우 아랍군을 몰아낸다. 1982년에는 5차 중동전쟁으로 불리는 레바논 전쟁이 일어난다. 이스라엘은 민간인 정착촌을 미사일로 폭격한 레바논 거주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를 추격한다는 명분으로 레바논을 침공한다. 그 결과 한 달 만에 2만 명의 팔레스타인인과 레바논인이 사망한다. 이로 인해 레바논에서 강경 조직 헤즈볼라(Hezbollah)가 결성되었다. 강경 조직의 등장에는 역시 극단적인 폭력의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지난 2006년 여름에도 헤즈볼라의 로켓 공격으로 3명의 이스라엘 군인이 사망한 데 대한 보복으로 이스라엘은 34일 동안 레바논을 공습했고 남부 지역을 침공해 1100여 명을 살해했다. 이스라엘 측에선 160여 명이 사망했다. 이런식으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지역의 분쟁은 오래된 만큼 복잡하게 이루어져있다. |
07 |
![]() |
국제 분쟁- 센카쿠열도 분쟁 10701 고예림 댜오위다오는 중국·타이완·일본이 서로 영유권을 주장하는 민감한 지역이다. 타이완에서 동북쪽으로 120해리(222km), 일본 오키나와에서 남서쪽으로 200해리 떨어진 해상에 있는 댜오위다오는 섬 5개와 암초 3개로 구성되어 있다. 이 지역이 분쟁의 중심지가 된 것은 원래 중국 영토였던 댜오위다오가 19세기 말 청일 전쟁 이후 타이완과 함께 일본에 강제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2차 세계대전에 패한 일본은 타이완을 중국에, 댜오위다오는 미국에 이양했다. 미국은 1972년 오키나와를 일본에 반환하면서 댜오위다오까지 포함해 줄곧 중국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댜오위다오는 군사 전략상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중국의 처지에서 댜오위다오 선점은 일본 오키나와에 주둔한 미군 기지를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군사 대국화하려는 일본의 해양 진출을 막을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중국과 마찬가지로 미국과 일본 또한 군사 전략상 이 섬을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처지이다. 중국은 일본의 군사력 강화를 줄곧 의심해 왔다. 중국의 한 외교 전문가는 미국이 동북아 지역의 안정을 위해 일찍부터 일본의 지역 패권을 은근히 부추겼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면서 “최근 양국 불화의 쟁점이 되는 댜오위다오 문제의 배후에는 미국이 존재하고 있는데, 미국은 이른바 이일제중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라고 분석한다. 댜오위다오에는 일본이 설치한 등대가 작동하고 있으며, 일본 해경이 호위를 맡고 있다. 그러나 중국은 역사상 명백한 중국 영토를 일본이 청나라가 쇠약한 틈을 타 훔친 것이라며 국제법에 어긋난다고 주장하고 있다. |
08 |
![]() |
국제 분쟁-카스피해 분쟁 10701 고예림 카스피해는 아시아 북서부와 유럽 사이에 있는 내륙호이다. 카스피해의 면적은 371,000 km2에 달하는 세계 최대 내륙호로, 그 안에 한반도 전체가 들어가고도 남는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는 히르카니아해로 불렸으며 많은 석유와 천연가스가 존재한다.카스피해는 러시아아제르바이잔, 이란,투르크메니스탄, 카자흐스탄 사이에 있다. 아제르바이잔의 입장에서는 카스피해가 바다로 규정되어야 12해리+EEZ에서 나오는 석유를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다.여기에 러시아의 심사가 뒤틀렸다. 소련 시절에 바쿠 유전에서 생산된 기름을 마음껏 가져다 썼는데, 이젠 그것을 빼앗기게 되었으니 카스피해를 호수라고 해야 해상유전의 기름을 나눠 갖게 된다.군사적 배경도 있다. 카스피해가 호수이면 러시아와 이란은 자국 해군을 상대국 해안에 해군을 배치할수 있다. 이에 비해 신생 3개국은 강대국의 함선이 자국 연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면 국제해양법의 보호가 필요했다.다섯 나라가 오랫동안 티격태격하다가 2018년 8월 12일 카자흐스탄 해안도시 악타우에서 만나 ‘카스피해의 법적 상태에 관한 협정’(Convention on the Legal Status of the Caspian Sea)에 합의했다.협정은 카스피해를 어떻게 규정했을까. 명칭은 바다(Caspian Sea)로 규정하고, 조약의 세부 조항에는 수역(body of water)이란 애매한 표현을 썼다. 절충안 같지만 대체적으로 호수라고 규정한 현상유지의 협약이란 평가를 받는다. 러시아와 이란이란 강대국이 카자스흐탄, 투르크메니스탄, 아제르바이잔을 누른 것이다. 5개국의 역사적 합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첫째, 적용할 국제법이 없다는 것이다. 바다도, 호수도 아니라고 규정했기 때문에 새로운 문제가 도출될 경우 협정 이행위원회가 합의에 의해 판단하거나 새로운 조약을 만들어야 한다. 합의가 이뤄지지 못할 경우 분쟁의 소지는 남게 된다. 둘째, 군사적 불균형을 인정했다는 점이다. 협정은 5개 연안국 이외의 군대를 카스피해에 주둔시키지 못하도록 하고 상대방 국가를 해상으로 공격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 조항은 역내에 분쟁이 발생할 경우 NATO의 개입을 차단하는 것이어서 러시아의 일방적 군사행동을 묵인하는 요인이 될 우려가 있다. 아제르바이잔,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은 카스피해를 비무장지대로 규정하자고 주장했지만 러시아가 반대했다. 셋째, 수면 아래의 광물자원과 어족자원에 대한 공동의 규정을 마련하지 못했다. 아제르바이잔,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 러시아는 쌍무 또는 3자 협정을 체결해 자원 배분에 관해 합의했지만, 이란은 주변 연안국과 자원 배분에 대립하고 있다. 자원 배분 문제에 대해 협약은 애매하게 넘어갔다. 넷째, 카스피해를 가로지르는 송유관 또는 케이블선 연결 문제이 해결되지 못했다. 아제르바이잔은 카스피해를 가로지르는 송유관을 건설해 투르크메니스탄에 원유를 공급할 계획인데, 이는 연안 5개국의 합의 사항으로 규정되어 있다. 러시아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환경문제를 걸고 넘어질 태세다. 연안국들 사이에 분쟁의 요소는 여전히 남아 있다. |
09 |
![]() |
국제 분쟁-수단과 남수단 분쟁 10701 고예림 수단 내전은 정치적 실권이 집중되어 있는 북부 아랍계 무슬림 정부와 남부의 기독교 부족들 간의 오랜 분쟁을 의미한다. 수단 내전은 1차와 2차로 나뉘는데 1차는 독립 직전인 1955년부터 1972년까지 약 17년이었다.그리고 2차는 1983년부터 2005년까지 발생한 약 21년간 지속된 전쟁이다. 두 차례의 내전은 각각 다른 인종에 따른 불평등에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특히 2차 내전은 불평등 뿐만 아니라 수단의 주요 천연자원으로 꼽히는 '원유'를 차지하기 위한 것도 큰 이유였다. 21년간 지속된 2차 내전은 피해도 매우 심각하여 분쟁기간동안 총 190만 명이 사망했고 400만 명이 넘는 남수단인들이 고향을 떠났으며 기근과 소년병 등 많은 인도적 위기 상황이 야기되었다. 앞서 오랜 내전을 겪어오던 수단은 2011년 남부 수단의 분리 독립을 위한 결정의 날이 진행되었다. 바로 1주일간 주민투표를 한 것이다. 물론 이때에도 유혈사태가 잇따라서 벌어졌다. 그러나 결론적으로는 90% 이상의 투표율을 보이며 98.83%가 독립을 찬성하였고 정식으로 2011년 7월 9일 남수단은 한 국가로써, 독립을 하게 된 것이다. 2013년 말 살바 키르 대통령 지지세력과 마차르 추종자들이 충돌해 내전이 발발하였고 수만 명이 목숨을 잃고 300여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내전의 재발을 예방하기 위해 유엔은 2011년 8월 아비에이에 1,700명의 남수단평화임무단(UN Missions in South Sudan, UNMISS)을 주둔시켰다. 2012년에도 큰 내전이 시작되어 전쟁 일촉즉발의 상황에까지 이르렀으나 유엔안보리가 결의안을 발표하는 등 국제사회의 적극적 중재와 압박으로 초기에 종결되었다. |
10 |
![]() |
국제 분쟁의 결론 10701 고예림 이번 국제 분쟁을 조사하다보니 국제 분쟁들에는 비슷한 공통점이 있는 것 같다. 우선, 강대국에 의한 통치의 아픔이 있는 국가들이 주로 현재까지 분쟁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독재 역시 분쟁을 장기화하는데에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역시 북한과 분단된 과정, 그리고 지금 겪고있는 영토적인 분쟁들이 이 사례들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세계대전의 그늘속에서 아직도 싸우고 있는 나라드릐 예시를 보면서, 또 그곳에 살면서 나는 이제 그 그늘에서 나와서 서로 정확한 '사실'을 가지고 정산하는 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각 국가나 국제 연맹에서는 자국민의 이익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 과정에서 희생당하는 수많은 목숨들을 위해 분쟁의 해결에 초점을 두고 타협한다면,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만약 아이들에게 이런 국제 분쟁에 대해 가르칠 때, 양쪽의 의견을 다 전달한 후에, 여러가지 관점에서 이 분쟁을 바라보면서 분쟁이 어떤 것이고, 이 과정에서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게 되는지에 대해 알려주면 좋을 것 같다. |
Category | General |
Recent edit date | 2020. 9. 28 03:24 |
Capacity | |
No. of pages | 10pages |
Resolution | 1280px X 720px |
Copyright | |
Privacy bound | |
Author/Source | 고예림 |
Education/e-Learning
3309
General
387
General
463
Reply ()